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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

Matsu 2021. 8. 22. 03:10


소위 말하는 독립영화라는 걸 별로 본 적이 없다.
당장 떠오르는 건 몇년 전 TV 케이블 채널을 틀면 나오던 <똥파리>?
앞으로 내가 보게 될 독립영화들이 다 벌새 같다면 두 손 들고 환영이다.

벌새 러닝타임은 2시간 19분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러닝타임부터 확인하고 2시간이 넘어가면 조금 긴장을 하는 편이다.
영화는 즐거우려고 보는 건데 가만히 앉아서 2시간 이상 집중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 되버리는 모순 때문이다.
다행히 벌새는 고통이 아니었다. 2시간 넘게 화면에 흡입당했다.

주인공 은희를 연기하신 배우분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
여동생이나 누나도 없고, 결혼해서 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중학생일 때 또래 여자애들이 어떠했는지 기억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났지만
정말 내 옆에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중2 여학생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았다.
(근데 1994년에 중2면 나보다 한참 누님인데 뭔가 잘못된 것 같기도?)
포스터에 써있는 '가장 보편적인 은희'가 이런 느낌일까?
남자친구와 알콩달콩 데이트 할 때,
친구와 갈등이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선생님 앞에 있을 때,
고성이 오가고 물건이 부서지는 부부싸움을 볼 때,
시선들이 하나하나 기억에 뚜렷하게 남는다.

1994년이면 나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데.
그 당시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피부에 와닿게 그 비극을 경험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내가 천안함이나 세월호를 생각했을 때 느끼는 감정들이 그 당시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할까?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지 선생님의 존재가 나에게도 오래 기억하고 싶은 학창 시절 선생님들을 다시 떠오르게 해줬다는 것이다.
은희에게 학교 담임은 돈 요구하는 미친놈이고,
기존의 한문학원 선생님은 바지가 리바이스 청바지 하나뿐인 존나 구린 사람이다.
하지만 영지 선생님은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다.
학교 선생님이든, 학원 선생님이든 나도 수많은 소위 '선생님'들을 만났고,
그 중 기억에 남는 선생님 두 분이 계시다.
첫 번째는 중3때 담임이셨던 박 모 선생님.
이 분은 그 당시 사라진 문화라고 생각했던 학생들 가정방문을 실천하셨다.
(물론 금품 요구 같은 건 아니었다.)
방학 때는 베트남 여행 가셔서 현지에서 엽서를 사서 모든 학생들에게 편지를 써주시고,
사비를 들여서 애들 서울대 견학을 시켜주셨고,
특목고 입시 시험 치르는 애들한테 손수 편지를 작성해 주시고,
봉사활동을 같이 다니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신 분.
두 번째는 초등학생 때 영어 학원 선생님이셨던 박 모 선생님.
어린 마음에 이 학원을 그만두는 날까지 수업은 항상 저 선생님과 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고 말씀하시며 당신께서도 눈물을 흘리고 반 친구들이 다 같이 눈물바다가 됐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내가 이 선생님들을 좋아했을까? 아니면 추억 보정일까. 기억 미화일까.
확실한 건 은희가 영지 선생님을 안으며 너무 좋다고 했듯이
지금 나는 그 선생님들이 너무 좋다.

한문학원 원장선생님은 영지 선생님을 '원래 좀 그렇다, 이상하다' 고 한다.
근데 어떤 모습이 이상했던 걸까?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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